시조 2 37

다산 초당

안개 정적을 싸고 정적 안개에 스며 흰 비단 너울을 쓴 파아란 동백 숲이 안개 속에서 손을 뻗는 까만 가지에는 가지마다 가을이 익고 있었다. 아침놀을 닮으려는 감이 있었다. 안개 속 정적인가 정적 속의 안개인가 정적에 싸인 섬들을 가리려는 안개인데 진록의 동백 숲도 안개의 면사포라 정적을 찢는 소리 산새 소리를 동백 숲은 조용히 받아들이고 안개는 가만히 감싸서 안는 촉촉한 안개에 싸인 茶香이 머무는 풀밭 보촉촉 안개에 싸여 안개가 흩어질까 옷을 여미고 돗자리 감촉 즐기며 茶를 마신다 香을 마신다

시조 2 2022.04.15

석양은 숙제를 주고

해님의 숙제는 너무나 무거웠다. 사랑을 갈망하다 사랑이 이루어진 자에겐 밤새 그 사랑에 푹 젖어 젖은 그 무게를 달고 이루어진 사랑의 대가와 비교하여 언제쯤 균형을 이룰지 계산해오고 사랑을 갈망하다가 이루지 못하여서 애타는 자에겐 욕망이 고독으로 전환되리니 밤새 그 고독에 사랑을 섞어 중화시키라고 사랑의 구심력에 끌려 사랑의 원심력에 밀려 사랑에 끌린 환희와 사랑에 밀린 고독을 내일까지의 그대의 성장의 거름으로 얼마나 그대가 자랄지 계산하라 하셨다. 사랑에 젖을는지 모르지만? 고독으로 전환될지 모르지만?

시조 2 2022.04.10

산책길에서

걷기를 권장하는 성화에 떠멀리어 나서는 산책길은 통증이 앞을 서고 눈치를 보며 보면서 나서는 아침 산책 좋아하던 여행인데 아픔이 팔 벌려서 찾아간 병원에선 마지못해 약방문을 그래도 혹시나 하고 희망 거는 산책이다. 지팡이는 세워놓고 담 더듬는 저 노인 말 안 듣는 다릴 끌면서 안간힘 쓰는구나 가는 곳 머지 않아도 조금만 더 조금만 길가 돌에 걸터앉아 아픈 다리 쉬려는데 짧은 봄을 길게 놀더라 춤추는 노랑나비는 춤이라 삶의 춤이라 생각하며 걸었네

시조 2 2022.04.04

비보를 듣고

저녁놀 끼었다더니 벌써 밤이 찾아왔나 밤이 왔단 그 소식도 귀를 건너 입을 건너 옛날로 돌아간다네 그립구나 그때가 남의 눈이 두려워서 서로 소식 못 전하고 언제나 마음 한구석 그가 숨어 있는데도 영전의 앞에를 마저 못 가는 이 풍습이 준엄한 풍습에 매여 숨어서 만나던 때 소설을 읽어 나가다 작중 인물 부러워서 구름 밑 앞산 이쪽에 그려보던 모습이 숨어서 쉰 한숨은 뒤란에 가득해도 부모의 영을 따라 그 품에 안기면서 그대가 안는 거라고 상상했던 죄스러움 겉으로는 지켜왔고 속으로는 못 지키며 그려온 깊은 정은 지금도 지울 수 없어 목놓아 울고 싶어라 영정의 앞에 가서.....

시조 2 2022.04.03

또다시 가고 싶은

경사의 눈썰매가 가속도가 붙는 세월 밟아온 모든 길은 양지, 평탄 길로 서고 다가올 미지의 그곳 캄캄한 동굴보다 가시에 찔린 자국, 엎어져 다친 무릎 상처가 아물기까지 몹시도 아팠는데 눈앞에 영상 비치니 그립구나 그 아픔도 애를 태운 일들이라, 받던 괄시의 쓰라림도 무릎 상처 아물 때 같은 그러한 느낌도 드는 그리운 옛 생각 뜨는 회고 늪에 잠겨본다 고추 같던 종아리 채 소태같던 꾸중도 그 모두가 정이었으리 돌아보면 정이 가고 저녁놀 바라고 서니 그래도 저런 놀이

시조 2 2022.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