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시 16

해바라기의 비명 (청년 화가 L 을 위하여)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비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함형수-- (시인부락 창간호.1936. 11 )

한국의 명시 2022.07.02

님의 침묵

님을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한국의 명시 2022.07.02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새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날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육사 시집-- 1946

한국의 명시 2022.07.02

청포도 절정

내 고장 칠월은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먼 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서릿발 칼날 진 그위에 서다.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어디다 무릎을 끊어야 하나 흰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이러메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이육사-- (문장 12호.) 1940. 1 두 손은 함뿍 젹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 문장 7호. 1939. 8

한국의 명시 2022.07.02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돌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우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말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

한국의 명시 2022.07.02

진달래꽃 접동새

나 보기가 역여워 접동 가실 때에는 접동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아우래비 접동 영변에 약산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달래꽃 진두강 앞 마을에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와서 웁니다. 가시는 걸음 걸음 옛날 우리나라 놓인 그 꽃을 먼 뒤쪽의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어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나 보기가 역여워 가실 때에는 누나라고 불러 보랴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오오 불설워 개벽 25호(1922.7) 시샘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산유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산에는 꽃 피네 해가 산마루에 저물어도 해가 산마루에 저물어도 꽃이 피네 해가 산마루에 저물어도 갈 봄 여름 없이 내게 두고는 당신 때문에 저뭅니다. 꽃이 피네 해가 산마루에 저물어도..

한국의 명시 2022.07.02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 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 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

한국의 명시 2022.06.29

유리창 1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패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정지용-- 조선지광89호 (1930. 1 )

한국의 명시 2022.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