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보리방아 찧다가.......

이슬과 노을 2022. 1. 19. 01:30

보리방아 찧다가 쓰러져 돌아가신 분이 계셨는데, 가난과 허기에 지쳐서 가신 그 분은, 초등학교때 친구의 어머니다.

참으로 옛날옛적 얘기같은 오래전 얘기지만, 그시절에는 모두 같이 가난하고, 모두 꽁보리밥을 같이 먹던 시절, "우리도

꽁보리밥을 먹었었는데? 우리 엄마는 보리방아를 찧지 않았었는데?" 하면서 이미 서울로 이사했기에 전해 들은 얘기를,

그렇게 우리엄마와 비교하며 의아했던, 어린소녀였고 철부지였던 나는, 살면서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더 짙어지는,가난

얘기를 느껴갔다. 하얀 수건을 머리에 쓰고, 커다란 앞치마를 두르던 차림은 그 시절, 유행일리도 없으면서 거의 모든 아낙들의 차림인것도 신기했었다. 친구집은,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대신 삼남매를 키우며 남의집 쪽방에서 옹색하게 지내던 모습을,놀러가서 가끔 둘러보았던 그 방모습까지 기억하는 나는, 얼마나 힘드셨으면 하필 그렇게 쓰러지셨을까 하는 안타까움과 함께 떠올린다. 세상이 훨씬 풍족하고 나아진 수준이지만, 가난과 부유함은 항상 공존하면서 이어가는듯 하다.

그 보리방아는! 쌀한톨 없이 통채로 보리로만 먹어야 해서, 그 거친보리알이 입안에 굴러다닌다며, 나무방아에 찧어서 

밥을 하면 좀 덜 까칠하리라고 찧었다고 한다. 엄마가, 그런 방아를 찧지 않은것은 도시에서 살다가 잠깐 2년만 살아봤

기에 그런것에 덜 익숙해서였지 싶다. 그 나무로된 방아는 지금으로 치면, 만들지도 않겠지만, 누군가의 손작업으로 덩치가 큰 고목나무를 속을 파서 만들었던듯 싶게 기억에 남아있다. 지금 누가 그걸 만들어 내놓는다면, 골동품수준일것 같다. 지금 남아있는, 그 삼남매의 가슴에는 애절하게, 가련한 모습의 엄마가 함께 했을것 같은 가난한 옛날얘기가 되어있다. 좀 더 평등하게 비슷하게 살아갈 수는 없는것이 세상살이일까? 누구나 한 생을 살면서 구비구비 고비를 넘어보지만, 

엄마도 혼자서 힘들게 꾸려나가는 살림을 했을텐데, 나는 너무도 엄마에게 철부지였고, 무심한 딸이었음을 뒤돌아볼수 있을때는, 엄마가 이미 돌아가신지 오래다. 특이하게 자식들을 따라가 미국에서 돌아가셨고, 나는 이민생활에서조차 엄마의 아픈 짐이었었다. 힘든노동을 하고 돌아온 딸을, 가슴아파서 어쩔줄몰라하시던 엄마는 그 시간에 맞추어 맛있는 반찬들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면서, 나를 위해 쓰레기통을 뒤져 맥주병을 구해놓고있다가,나를 엎드리게 하고는 종아리를

맥주병으로 문질러주었었다. 엎드린채 잠깐 잠이들기도 하던 내가 들었던, 엄마의 울음섞인 넋두리가 나를 울게 만들었었다. "세상에나, 한국에 그냥 살았으면 선생사모님소리나 듣고 편히 살았을낀데, 자식이 무어 그리 중해서 이 고생을 

하고 있노" 아들유학시킨다고 고생을 사서 하는 딸이, 손주보다 더 귀했고, 가슴아팠던것 같다. 잠시 엄마옆에서 살다가 

독립을 해서 살고있어도, 큰딸차를 타고서라도 부지런히 김치와 반찬을 날라다 주었고,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마당한켠

작은 텃밭에서 직접 키워 손질해서 이것저것 만들어내던 엄마의 손길을 잊을수는 없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깻잎을 한장한장 마른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양념장을 발라만들던 모습은, 사랑과 정성이 담긴것이라 그리워한다. 부모마음은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손자보다 더 귀하고 애정이 쏟아지는 딸사랑의 엄마였음이다. 그나마 내게 위안이 되었던것은, 역이민을

하고도 영주권때문에 일년에 두번씩 드나들던 내가, 엄마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나누었음이다. 암과 함께 치매증상도 있었지만, 자주 맑은 정신이 돌아오던 엄마는, 밤당번을 하며 지켜보고 있던 나와함께 옛날노래들을 구성지게 정확하게

부를수 있었던게 고마운 추억이다. 너무나도 평화롭게, 이쁘게 돌아가신 순간의 엄마곁에는, 거실이 꽉차게 가득메운 자식들과 손자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자리를 함께못한 사람은 내 남편뿐이었을만큼 교민들이 부러워하던 자리였었다.그 기도들을 들으시며 마지막 숨을 거둔순간을 기억한다. 침대 위아래로 엄마를 만지고 있는 형제들틈에서 나는 조그만 엄마발을 잡고 있었는데...... 장지에서, 관이 아래로 내려갈때, 내가 소리쳤었다. "엄마! 가지마!" 그러면서 큰절을 하려는내게 교민들이 일러주었다. "이쪽 아래로 와서 해!" 그러면서 함께 울어주었었던 교민들의 마음들! 줄이은 차량들로 장지까지 따라와주었던 교민들은 모두가 다  바쁜 이민생활이였는데도.......  

보리방아찧다가 돌아가신 친구어머니의 기억때문에 이어진 내 아픔이 되살아나는 밤이다.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잠 속에서 투정을....  (0) 2022.01.21
오이서리  (0) 2022.01.20
발견!  (0) 2022.01.18
반듯한 청년  (0) 2022.01.17
밝은 사람  (0) 2022.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