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옛날의 그 집

이슬과 노을 2023. 8. 20. 01:55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그루가

어느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면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 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애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이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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