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본보기처럼 전염성이 강한 것은 없다. 그리고 우리가 엄청난 선행을 하거나 엄청난 악행을 저지르면 반드시
모방행위를 유발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경쟁심 때문에 선행을 모방하는가 하면, 수치심이 가두어 두었지만
본보기가 풀어놓는,우리 본성의 악의 때문에 악행을 도모한다.
0. 자기 혼자만 현명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극도로 어리석은 짓이다.
0. 우리의 슬픔에 대해 어떠한 구실을 붙이든 그것을 초래하는 것은 흔히 사리사욕과 허영심뿐이다.
0. 슬픔에는 여러 종류의 위선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을 잃어서 애도한다는 구실 아래
자기 자신을 위해서 우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그의 호감의 상실을 애석하게 여긴다. 또한 우리의 안락함,
즐거움, 명성이 줄어들어서 운다. 따라서 죽은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흘려지는 눈물로 애도된다.
나는 이것이 일종의 위선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종류의 슬픔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속이기 때문이다.
또다른 종류의 위선이 있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감명을 주려고 애쓰는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악의적인 것이다.
이것은 아름답고 영원한 비탄의 영광을 열망하는 어떤 사람들의 슬픔이다.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시간이 그들이
실제로 겪은 슬픔을 종식시킨 뒤에도 그들은 울고 한탄하고 한숨 쉬는 일을 완강하게 계속한다. 그들은 비탄의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자신의 비탄은 오로지 자기가 죽어야만 끝날 것이라고 모든 행동을 통해서 남들을 설득하려고
애쓴다. 처량할 뿐만 아니라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이러한 허영은 대개 야심이 많은 여자들에게서 발견된다. 여자
들에게는 영광에 이르는 모든 길이 막혀 있는 만큼 그들은 위로가 불가능한 슬픔을 과시하여 유명해지려고 애쓰는
것이다. 또 다른 종류의 눈물이 있는데, 이것은 쉽게 넘쳐흐로고 쉽게 말라버리는 작은 샘에서만 나오는 것이다 사람
들은 다정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기 위해서 울며,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동정하여 울어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울며,
끝으로 말하자면, 울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 운다.
0. 우리가 가장 널리 지지를 받는 의견을 매우 완고하게 반대하는것은 흔히 이해력의 부족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존심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앞좌석들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런데 뒷좌석들 가운데 하나도 앞좌석
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0. 친구들의 불명예가 그들을 위해 우리의 우정을 드러낼 기회를 줄 때, 우리는 친구들의 불명예에 대해 쉽게 안도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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