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향수

이슬과 노을 2023. 10. 11. 23:33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ㅡㅡㅡㅡ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게를 돋아 고이시는 곳,

ㅡㅡㅡㅡ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ㅡㅡㅡㅡ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ㅡㅡㅡㅡ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ㅡㅡㅡㅡ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정지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