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의 시
늦가을 산책길에 (독일편)
이슬과 노을
2023. 6. 14. 23:11
가을비가 잿빛 숲을 들쑤셔놓았다
아침 찬 바람에 골짜기가 화들짝 놀란다.
툭툭 밤나무에서 밤송이들이 떨어져
터지면서 촉촉하게 갈색으로 웃는다
나의 삶을 가을이 들쑤셔놓았다.
너덜너덜 찢어진 이파리들을 바람이 쓸어가고
나뭇가지 가지마다 흔들어댄다ㅡ 열매는 어디에 있나?
나는 사랑을 꽃피웠건만 열매는 고통이었다.
나는 믿음을 꽃피웠건만 열매는 증오였다.
내 앙상한 가지를 바람이 훑어간다.
나는 바람을 웃어넘긴다. 아직은 폭풍을 견딘다.
무엇이 내 열매인가? 무엇이 내 목표인가! 나는 꽃피웠다
그러니 꽃피는 것이 내 목표였다. 이제 나는 시든다.
그러니 시드는 것이 내 목표다. 다른 무엇도 아니다.
마음에 심어둔 목표는 단명한다.
신이 내 안에 산다. 신이 내 안에서 죽는다. 신이 괴로워한다.
내 가슴속에서, 그것으로 목표는 넘친다.
길이든 미로든, 꽃이든 열매든,
모두가 하나다. 모두가 그저 이름일 뿐.
아침 찬 바람에 골짜기가 화들짝 놀란다.
툭툭 밤나무에서 밤송이가 떨어진다
툭툭 환하게 웃는다. 나도 덩달아 웃는다.
--헤르만 헤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