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시편
흰 그림자
이슬과 노을
2023. 2. 19. 23:36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종일 시든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거미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닫는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