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웃겨주는 인심과 情

이슬과 노을 2022. 8. 29. 01:17

봄 가을에 드나들면 내겐, 뜻깊고 정겹고 가슴이 확 트이면서 그 광활한 대륙에 취할 여유도 생긴다.

옛날에는, 토요일에 큰 맘 먹고, 고물차 타고 정해진곳 Art 타운에  다녀오고, 일요일엔 성당에서 교민들과 만나고

한국말 싫컨하고 서로들 정을 나누고 그런것이 최대의 활력소가 되고 소통이 가능한 전부였다. 일요일저녁이면

그 다음날 시작되는 거친 일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니까, 작은 일도 신경쓰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잠을 청해야 하는 가장 힘든밤과 씨름을 해야했다. "에고, 이제 집에 가서 잠을 자야지 일을 하고, 일을 해야 먹고

살고...." 한숨쉬며 우울해지면서 다들 헤어진다. 하이웨이 몇번을 달리다 어디에서 로칼로 접어들고 집에 가면 혼자 있는

아이와 저녁을 챙겨먹고 일찌감치 쉬다가 잠들고, 새벽 5시의 알람소리에 벌떡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6시에는 집을 나서야했던 그 내모습이 뚜렷이 떠오를때면 우울해지는 고질병으로 남아있다. 장사를 하는 부부도 한사람은 꼭 큰곳의 공장이나

큰 건물의 청소라도 해야한다. 그 의료보험이 절대적인 이유! 한달에 20여불 보험료에 가족모두의 병원비에 안심하고 살아야 하다니! 나도 2년만에 허리를 다쳐 그 보험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고, 한국을 다녀오기도 했으니, 무서운 위력이었다.

이렇게 나이들어서는 좋은것만 기억하고, 좋은 추억만 떠올려도 아까운 세월인데, 그런 고생은 잊혀져주지 않는다.

내가 함께겪어서, 그 교민들의 심정을 너무나 잘 알기에, 나는 미국에 갈때는 남모를 준비를 했었다. 아주 열심히, 녹음도 하고, 별로 좋아하지 않는 TV에서 웃기는 프로를 찾아서 머리에 입력시키는 일! 그것은 내 나름대로 정들었던 교민들에게 

웃음을 안겨주고싶은, 진심이어서 생긴 성의였기 때문에 나름 꽤 신경써서 준비하고 떠난다. 언니를 통해 내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금요일밤에 모이는 모임이 있었다. 언니와 내가 친하게 지내던, 그리고 몰래 불러내어 짬뽕을 먹여주고, 드라이브를 시켜주던 고마운 인연들이 모여든다. 금요일밤이라서 마음껏 웃고 편하게 보내던 시간은, 모두에게 금같은 시간이지만, 개그우먼도 아닌 나에게서, 한국내음을 맡고 싶다고 찾아오는 여인들은, 그야말로 맘껏 웃어대고 싶어서 온다고 했다.

한국가게에서 비디오를 빌리면 드라마나 연예프로도 볼수가 있지만, 그것도 여간해서 차지하기가 힘들다. 어느 드라마는

기다리기 싫어서, 몇집이  모여 함께 본다고 들었다.그나마 친한 몇집에서 생긴 일이라, 아예 포기하고 만다고 들었다.

"영화 보는날" 그 모임이름이었다. 모여든 여인들은, 누워서든 앉아서든 나를 올려다보며 신나게 웃어댄다. 하룻밤에 피로를 풀어주는 개그우먼으로 쓸만하다고 추켜주니, 나로서는 갈때마다 성의껏 준비를 하게 된다. 대목대목 무릎을 치며, 바닥을 치고, 딍굴며, 눈물까지 닦아가며 몇시간 한국을 다녀온다. 같은 말이라도 재미있게 하는 재주가 있었을까? 내 까칠한 성격에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던지 나도 신기했다. 소녀적부터 예민하고 낯가림이 심하고 곧잘 쓰러지는 학생이었고, 그런쪽은 상상도 못할 지경이었는데, "아무개! 너는 왜 그렇게 얼굴이 잘 빨개지냐? 무서워서 어디 불러보겠냐?" 선생님들에게서 그런 얘길 들을정도였는데.... 이제금 생각해보면 사람마음이, 진심이면 가능해지는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더구나 나이들면 어느정도 변화되어가는 것을 본인이 더 잘 아는것 같고, 가치관이나 인간관계도 아주 판이하게 달라져 가는것같다.

다시 이렇게 칩거생활로, 침묵으로 일상을 보내지만, 그때만 해도 젊어서였을까? 그 모임에서 나는 두어사람 특히 친한 분이 있었다. 서로 티를 안내고 비밀유지를 열심히 하면서 나는 과분한 "정(情)"을 받았다. 한분은 너무나 가슴아픈 사연을 안고 들어와서 뼈저리게 외롭고, 힘들게 살아내면서 집안이 반짝일정도로 가꾸는 일밖에, 사람을 사귀는일에  아주 힘든분이었다. 나를 부르는 소리마져 가슴이 찡해지듯 이상한 느낌이 있었다. "ㅡㅡ씨" 하는 호칭에 외로움이 배여있는듯 다정했다.

아주 열심히, 나를 드라이브시켜주는 특별한 배려도 그 고독감에서 묻어오는것 같았다. 더구나 옛날 그 시절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실제 나이보다 7살정도는 늦게 호적에 올려서, 72살이 넘어서도 그 노동을 해야한다며 울었었는데, 그래야 연금이 나온다며 한탄했었는데.....암으로 투병생활마저 외롭게 하다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왜 그렇게 우울한 인연이 많았던지 그마저 안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