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포도 절정
내 고장 칠월은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이육사--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봄은 고양이로다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 이육사 --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광야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까마득한 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하늘이 처음 열리고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모든 산맥들이 -- 이장희-- ^금성^ 3호. 1924.5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향수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넓은 벌 동쪽 끝으로
끊임없는 광음을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부지런히 계절이 피어선 지고 얼룩백이 황소가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지금 눈 내리고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비인 밭에서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다시 천고의 뒤에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짚 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육사 시집 -- 1946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깊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조선지광. 65호 ( 1927.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