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완행열차와 급행열차

이슬과 노을 2022. 1. 24. 23:57

중학교때, 나는 무조건,내가 살던 곳이고, 아버지가 묻혀계신 그 시골로 잘 갔었다. 하루에 다녀와야 하고 또 어두우면 무서우니까 아침부터 서둘러 나섰고, 우리 형편에 적지않은 기차삯을 엄마는 살며시 쥐어주었었다. 내가 하는 일은 무조건

해주고 싶어하는 마음과, 내가 나설 준비를 부랴부랴 하면 그 정해진 비용을 쥐어주던 엄마는 이미 딸이 아버지에게 간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더 가만히 쥐어주던 그 돈이 100원쯤 되던 기억이다. 서울역으로 가서 기차표를 사면서, 그때로서는 왕복티켓을 한번에 미리 사는방법도 없을 때라, 나는 갈때도 올때도 무조건 서둘러야 했었다. 손목시계도 없었을때

였다. 표를 끊어 플랫홈에서 기다리는 내 앞을, 여러편의 다른 기차들이 지나가곤 한다. 통일호, 무궁화,급행 그런 이름들

의 기차가 지나가도, 내가 타야할 부산행 완행열차만 기다리면서도, 요금이 조금씩 다른 기차는 내몫이 아니라는 체념속에서도, 은근히 그 모습들을 보며 차이점을 알기도 했었다.급행열차는 빨간우단의자 등에 하얀 등받이가 단정히 씌워져 있었다. 저게 요금차이와 속도 차이겠지, 나도 어른이 되면 저 급행열차에 앉아볼 수 있겠지 하면서도 나는 완행열차에 그리 서글프지도 않고, 그저 아버지한테 간다는 설레임으로 좋았던 것은 내 마음을 털어놓을  오직 한가지 이유?

그때 오빠가 어린 나이에 산업은행에 다니고, 월급을 6000원쯤 타서 얼마를 엄마에게 드리면, 엄마는 눈물글썽이며 그 돈을 만져보곤 하는 모습을 몰래 훔쳐보면서도 엄마가 불쌍했었다. 고생고생하던 그 긴세월동안 얼마나 힘들게 생활을

꾸려갔을까? 그래서 저 돈이 저렇게도 눈물나게 고마운걸까? 나는 이미 삐딱한 사춘기에 접어들었던지, 그 오빠와 엄마를 번갈아보면서도 오빠에게 고마운 생각은 깜찍하게도 하지않았던 기억이다. 아들이 출근하려고 나서면 엄마는 아들몰래 살금살금 뒤를 따라가서 출근버스에 타는 모습을 꼭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눈물을 훔치면서 돌아오다가 내게 들키곤

했다. 내가 그때, 좀더 속이 깊고, 효녀였고, 삐딱하지 않았더라면 엄마마음을 더 따뜻하게 해 주었을텐데..... 

"엄마! 오빠가 근사한 은행버스로 출근하니까 참 대견하고 행복하지? 그지? 엄마!" 팔짱을 끼면서 엄마얼굴을 쳐다보는딸이었으면 참 좋아했을 엄마인데, 왜 엄마는 내 눈치를 보았을까? 우린 서로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거였다. "그래도 이왕이면 오빠를 좀 좋아하지 그러니? " 그러지도 못하던 엄마는 나와 함께였었다.내가 유독 큰오빠를 너무 좋아했었고, 그 큰오빠가 슬프게 죽었던 이전에, 작은오빠가 큰 오빠에게 상처를 준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는 것이, 지나치다는 것쯤은 알게 되는 나이였기에, 나로서도 갈등과 양심같은것이 있었다. 그래도 오빠를 피해 다니고, 조용한 사춘기의 나는, 그 오빠가 일년도 지나지 않아,정확히 엄마를 행복하게 해 주었던 자식의 자리를 벗어나 유학을 떠나버린 이후로 엄마와 나는 거의 말을 잃었었다. 그래서 더,아버지를 찾아 하소연하며 울었었다. "아버지! 오빠가, 엄마랑 우리를 버리고 유학을 가버렸어요. 엄마가 불쌍해요. 엄마 좀 도와주세요." 그리고는 부리나케 뛰어 기차역으로 가야했다.

그렇게 돌아오던 완행열차는! 참 느리다는 생각과 덜커덩거린다는 생각이 베여있었던지, 돌아온 나를 가만히 등 두드려

주던 엄마는, 내게 아무런 말도 시키지 않고, 이유도 묻지않고 그래서 엄마는 내게 더욱 가슴아픈 그림자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현관문밖의 외출을 할 수도 없고, 내일 필사적으로 혼자 감행하려고 하는 계획을 안고 마음졸여야 하는 기막힌 환자 그 이상도 아닌, 누구나 놀라워 할 일상을 무섭게 해 내면서 고독? 외로움? 같은 단어를 사치라고 여겨야

한다. 그래도 나는 이런 밤에, 컴을 켜고, 블로거를 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이 무슨 이상한 대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