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엄마!
누구에게나 엄마는 특별하다. 그리고 아련하게, 가슴아프게 남아있지 않을까 싶으면서, 오늘도 유난히 엄마생각에
잠겨서 하루를 보낸다. 오이서리 에 따라갔다가 엄마를 놀래게 했던 그즈음, 나는 앞집 순이와 함께 보자기 하나를
두번 묶어 만든것을 들고 감자이삭을 하러 갔었다. 무언지 모르고 따라간 나는, 순이가 일러주는대로, 감자수확이 끝난
빈 터에서 신기함속에 한보따리 그득 감자를 채웠다. 순이 말대로 호미자국이 짙은곳보다 얕은곳을 더 파고들면,
커다란 감자와 새끼들이 주렁주렁 달려나오는것에 빠져서 신이 났었다. 순이 어깨가 들썩하니 내게 의기양양하고.....
어떻게 그 옛날, 이삭줍던 그 빈 터에서의 모습이 흑백사진처럼 또렷할까 싶어서, 진통제약도 없이 온몸의 통증과 씨름하며 하루를 힘겹게 보내는 나에게 신선함이었다. 요즈음 자꾸만 떠오르는 옛 생각과 엄마생각은 이 고통을 쓰다듬어
주는듯한 위로를 느끼는 나약함! 그래도 추억에 빠져들기에는 내 일상이 너무 뼈저리다 싶으면서도 결국 추억이란
아름다움인 것임을 알게된다.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지도, 왜 엄마가 화를 내고, 야단을 쳤을까, 그 순간에 알아차리지도
못한채 난 서러워했었다. 소쿠리도 아닌, 커다란 사각헝겁을 두번 묶어 만들어 푸짐하게 들고와서, 엄마를 큰 소리로
부르며 자랑하다가, 낯선 엄마의 모습에 울어버렸던 나였다. "누가 이런것을 주워오라고 했느냐며, 다신 가지말라면서,
얼굴표정이 무척 이상하다 싶던 엄마의 마음을, 한참 살아본뒤에 그것이, 엄마의 설움같은것이었겠다 싶은 자각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꽁보리밥을 먹어야했고, 그 생활이 갑자기 닥친 시련이고, 당황함속에서 생활을 꾸려나가던 겨우
40중반이던 엄마! 딸이 철없이 주워온 감자 한보따리에 민감해야 했던 엄마마음을 모를 수 밖에 없는 나였다. 그 모습이
내 나름대로, 충격이고 무서웠고, 다시 나서지 않고 엄마눈치를 살폈었다. 딸아이가 "가난"이라는 것을 느끼는게 너무도
싫었을 엄마인데, 나는 앞집 순이가 다시 가자고 해도 따라나서지 않았던 기억이다. 신기하게 주렁주렁 나오는 굵은 감자가 참 신기했고, 그것을 쪄달라고 해서 소금에 찍어먹으면 좋겠다 상상하며 돌아와 엄마를 큰소리로 부르던 나는 엄마
에게서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자랐었다. 언니들 몰래 들려주던 얘기 "니는 우째 타고나면서 이쁨을 한 몸에 안고 태어났나보다. 아버지가 너만 무릎에 앉히고 얼르면서 내를 놀라게 했고, 할머니도 너만 이뻐하고....." 정말 그러했던 아주 어릴적의 할머니 기억도 내겐 또렷하다. 엄마는 아침마다 내가 세수할 시간에 맞추어서, 바쁘게 가마솥에 다시 불을 지펴 물을
끓여, 세수대야에 손으로 저어 따뜻함을 확인하면서 내게 내밀던 엄마는, 수건들고 기다려 얼굴까지 닦아주려고 하면, 나는 짜증부리며 피하던 응석을 모두 받아주고 엉덩이 두드리며 웃어주던 호강을 했는데, 그래서 당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몇년을 누워지내면서 나와 그 교감을 다시 선물해주었던것 같다. 우리 다섯딸들은 다짐했었다. "우리, 올케언니 기대하지말고, 우리끼리 열심히 교대하면서 엄마가 우리 모르는 순간에 혼자 떠나게 하지말자" 그리고는 낮, 밤당번을 교대로
하면서 엄마를 지켰지만, 괜히 남편에게 미안해서 두달이면 돌아가야 했던 내가, 충격을 받은 일은 지울 수가 없다. 한국으로 가는 공항에서 언니에게 부탁해 엄마와 통화를 시도했을때, 언니 말로는 "엄마가 삐졌나보다. 전화받는걸 마다한다"속상해서 돌아온 한국에서 그저 울고 울며 애태우던 가슴은, 아마도 마지막 당번, 교대가 될려고 했던지 남편이 다시
2주만에 미국에 보내주었다. 정말로 마지막 교대가 되어 길게 밤당번을 하다가 이별을 했는데, 그래서 우리는 밤마다 더
애틋했고, 나보다 엄마는 가슴으로 정리를 하고 있었던것 같았다. 쇼파에 앉아 지키면서 잠깐 졸다가, 깜짝놀라 다가가서
엄마가슴에 귀를 대보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 내 아직 안 죽었다. 너나 좀 눈 붙이거라 " 얼마나 무안하고 놀랐던지 나는 그저 애교를 부리고 "우리 노래해볼까? 노래방 가는 연습해볼까?"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밤마다의 우리 행사였다.
내가 침대위에 올라가 누우면 왼팔로 나를 껴안아주고 함께 부르던 노래는 10곡의 선곡이었다. 타향살이, 갑순이와 갑돌이, 목포의 눈물..... 그 얼마의 시간이 정말로 마지막 교대였고, 나는 엄마와 더 짙은 추억을 만들어갔다. 이층에서 자다가
내려와 시작된 밤당번의 나는 그저 엄마 지켜보며 궂은일을 하지않고도, 주위사람들로부터 과분한 칭찬을 받았었다. 한국에서 오가며 엄마지킨다고.... 지금 생각하면 그 밤마다 부르던 우리 노래들을 녹음이라도 해둘것을 하고 아쉽다. 기저귀를 갈때, 엄마는 온통 예민해져서 자세를 바꾸거나 히프를 살짝 들어준다. "에구, 엄마는 나 힘들까봐 도와주는거야?" "시끄럽다. 고마! 빨리 하기나 해라!" 그 대답은 가끔 목메어 있기도 했었다. 누구나 가지는 엄마와의 이별은
그렇게 모두가 맞이하는 슬픔이고 아픔이고 아쉬움이 아닐까? 조금이라도 더 잘해드릴껄 하는 후회는 또한 누구나의
가슴에 아픔이기도 하다.